<차마, 소중한 사람아>
첫눈이 내린 날 감성에 젖어 애들 방 책장을 서성인다.
그러다 만난 시집 <차마, 소중한 사람아>라는 시집이다.
1994년 4월에 남편에게 이 시집을 선물했던 모양이다.
생일엔 가끔 시집을 선물하긴 했어도 뜬금없이 4월 어느 날 이 시집을 남편에게 선물하다니..
참 오글거린다.
개면 적어 보너스를 많이 챙겨 주었나? 라며 기억을 소환해보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없고..
지금은 절판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시을 모아 그땐 몇 권의 시리즈로 출판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튼 시집을 넘기며 시 몇 편을 옮겨 본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눈물 연가
-나혁채-
한 여인 앞에
산처럼 남고 싶다
그 여인이 마음 놓고
와 안겨 울 수도 있고, 마음 놓고
바라보며 위안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고 싶다.
그 여인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게
이젠 아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빙긋이 웃어 보이며,
찢긴 가슴 바위 속을 눈물로 가득히 채울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아 있고 싶다.
물론 , 나도.
그 여인이 마음 놓고
와 안겨 웃을 수 있고, 마음 놓고
바라보며 그리워할 수도 있는
그런 산처럼 남아 있고도 싶지만,
그것은 영 분에 넘치는 일이라
그저 한 가지, 노자 삼아 떠날 수 있게,
나 숨지면 , 눈물이나 몇 방울 보내 주지 않을까 하다가,
아니,
아예 그런 욕심까지 끊어버리고
제 타는 눈물로나 배를 띄워 떠나갈
그런 산처럼 나는 남아 있고 싶다.
다만, 그 여인이 마음 놓고
와 안겨 울 수도 있고, 마음 놓고
바라보며 위안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고 싶다.
오직 한 여인 앞에
산처럼 남고 싶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나도 이젠 안다.
그 청초했던 시절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시의 해석이었을 것을,
아니면 감성이 달랐을 거란 생각이다.
이젠 삶이란 현실을 예전의 꿈 많던 그 시절과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오래된 시집은 내게 더 많은 감성을 꺼내게 해서 좋다.
시집도 남편에게 선물하던 그 시절의 풋풋함으로 돌아가 오늘은 퇴근길 남편을 반가히 반겨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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