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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의 나무를 읽으며 추억을 새기다

by 청향 정안당 2020. 7. 2.

벌써 7월이니 올해의 반이 지났다.
지난 6월은 결혼기념일이며 남편의 생일도 있던 달이다.
이제는 결혼 몇 주년 인지도 모르며 어느 땐 결혼기념일 조차 잊곤 하기도 한다.
남편 생일이야 내가 챙기니 잊을 리 없는데 아들이 결혼하니 이젠 며느리가 무슨 날이면 용케도 잘 챙긴다.

남편 생일 얼마 전,
책장에서 류시화 시집을 꺼내보다 첫머리에 손글씨로 쓴 내 글씨를 보고 추억을 소환한 시집.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집을
남편 38번째 생일에 이 시집에 수록된 '나무'를 손글씨로 시집 첫 장에 써서 생일 선물을 했다는 기막힌 추억의 증거가 있었다.
나도 잊고 있었으니 남편인들 기억하겠는가?
그때는 무슨 감정으로 이 시집을 선물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그때도 이런 감성이 있었다니 참으로 풋풋하다.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류시화의 나무-

류시화 시를 특히 좋아했던 터라 시집의 제목이 너무 예뻐
사온 시집이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 달달한 시적 언어에 푹 빠져 이 시를 달달 외우던 곱디 고운 내 청춘이었다.
그리고 그중 남편 생일날 '나무'라는 시를 골라 손글씨로 시를 옮겨 적어 선물했었다.
이제 반백이 훨씬 넘어 그날을 회상하니 참으로 세월이
유수 같다.
이젠 남편도 늙어
버릴 나뭇잎은 있는지,
열어 줄 품은 얼마나 있으려는지 서로가 서로를 보면
그저 나이테가 박힌 우뚝 선 나무는 되겠지.
이젠 서로를 보면 차라리 '산안개'가 더 어울릴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안개
나에게 길고 긴 머리카락이 있다면 저 산안개처럼
넉넉히 풀어 헤쳐
당신을 감싸리
-류시화의 산안개-

이젠 그때 보이지 않던 이 시가 더 절절하다.
그동안 수고한 삶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더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해 서로의 약속처럼
이 시를 반복 읊조려본다.
시집을 덮으며 한때는 너무도 사랑했던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를 다시 한번 외워보며 오늘 아름답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본다.

수암골1987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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