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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다> 류시화

by 청향 정안당 2020. 7. 6.

산책길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휘엉청이다.
높은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보며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산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달을 쫒는다.

 

산채길에서 보름달을 마주하다

 

달맞이하듯 보름달을 가슴에 품고 집에 와서 며칠 전부터
테이블에 두고 읽어보던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집을 다시 넘긴다.
시집은 나와 같이 세월을 묻혀 색 바랜 책장에선 큼큼한 냄새가 나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그 냄새가 좋아 코를 대고 냄새를 깊게 마셔본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몇 번을 넘기며 가슴에 새기듯 넘긴 첫 장을 또 넘긴다

 

산책길에 구름에 숨은 달을 찍다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달을 이고 있는 청주 명암타워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녁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의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류시화-


시에서 삶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이젠 나이 탓인가?
젊은 어느 시점엔 이리도 가슴을 저미며 읽지 못했던 시를 지금은 마치 안개처럼, 나그네처럼 가슴에 파고든다.
그토록 커다란 보름달이 나를 들뜨게 하더니 이제는 깊어가는 이 밤에 나는 묻는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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